시칠리아 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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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칠리아 속주는 로마 공화정 시대에 시칠리아 섬에 설치된 로마의 첫 번째 속주이다. 기원전 241년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꺾은 후 설치되었으며, 곡창 지대 역할을 하며 로마에 중요한 식량 공급원이 되었다. 속주 시대에는 노예를 이용한 대규모 농업이 발달하면서 노예 반란이 2차례 발생했고, 로마 제정 시대에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재편되었다. 시칠리아는 로마 공화정, 제정 시대를 거쳐 반달족에게 점령당하며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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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리눈테는 기원전 628년경 메가라 히블라이아 이주민들이 시칠리아 섬 남서 해안에 건설한 고대 그리스 식민 도시로, 도시 이름은 야생 샐러리에서 유래했으며, 카르타고에 의해 파괴된 후 재건되지 못하고 현재는 고고학 유적지로 남아있다.
시칠리아 속주 | |
---|---|
지도 | |
![]() | |
일반 정보 | |
로마자 표기 | Provincia Sicilia |
역사 | |
시작 | 기원전 241년 |
시작 사건 | 제1차 포에니 전쟁 종결 후 설립 |
종료 | 476년 |
종료 사건 | 서로마 제국 멸망 |
이전 | 고대 카르타고 |
이전 국가 깃발 | Symbol of Tanit.png |
이전2 | 시라쿠사 왕국 |
이전 국가 깃발2 | Dinastie della grecia occidentale, hieron II, 32 litri di siracusa, 274-216 ac ca.JPG |
이후 | 시칠리아 테마 |
이후 국가 깃발 | Simple Labarum.svg |
정치 | |
정치 체제 | 로마 속주 |
수도 | 시라쿠사 |
현재 국가 | |
현재 국가 | 이탈리아 몰타 |
2. 역사
기원전 8세기부터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이 시칠리아에 식민 도시를 건설하면서, 시칠리아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특히, 그리스 식민 도시 시라쿠사는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시칠리아의 패권을 장악했다.[4]
맘메르티니라고 불리는 캄파니아 용병 집단은 메시나를 장악했고, 시라쿠사의 장군 히에론 2세는 이들을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맘메르티니는 카르타고에 이어 로마의 지원을 요청했다.[4] 로마는 맘메르티니 지원을 결정했고, 이는 제1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241년)의 발발로 이어졌다.
로마는 메시나에서 시라쿠사와 카르타고군을 몰아냈다. 기원전 263년, 히에론 2세는 로마와 평화 조약을 맺고 동맹이 되어 로마에 곡물과 공성 무기를 제공했다.[5]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자 로마는 시라쿠사를 제외한 섬 대부분을 정복했다. 시라쿠사는 히에론 2세의 통치 아래 광범위한 자치권을 유지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에 큰 피해를 입혔다. 로마와 카르타고 양측 모두 잔혹 행위를 저질렀고, 많은 주민들이 노예로 팔리거나 도시가 파괴되었다.
로마의 승리로 시칠리아 섬 전체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시칠리아는 로마의 첫 속주가 되었으며, 프라에토르(지방 장관)와 두 명의 퀘스토르(재무관)가 파견되어 통치했다. 기원전 227년에는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시칠리아의 프라에토르로 파견되었고, ''렉스 프루멘타리아''에 의해 곡물 공물이 부과되었다.
이후 시칠리아는 번영했지만, 제1차 노예 전쟁 (기원전 138~132년)과 제2차 노예 전쟁 (기원전 104~101년)이라는 두 차례의 노예 반란이 일어났다.[16][17]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시라쿠사는 카르타고 편에 섰다.[9] 히에론 2세 사후, 그의 손자 히에로니무스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다.[9] 이에 로마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를 파견하여 시라쿠사를 공격했다. 기원전 212년, 시라쿠사는 함락되었고, 아르키메데스를 포함한 많은 주민들이 사망했다.[10] 시라쿠사는 로마 속주에 편입되어 수도이자 총독의 소재지가 되었다.[10]
로마의 시칠리아 통치는 곡물 수탈과 라티푼디움(대농장) 확대로 이어졌다. 억압받던 노예들은 에우누스가 이끈 제1차 노예 전쟁(기원전 135년 ~ 기원전 132년)[16]과 살비우스 트리폰과 킬리키아의 아테니온이 주도한 제2차 노예 전쟁(기원전 104년 ~ 기원전 100년)[17]을 일으켰다.
가이우스 베레스의 가혹한 수탈(기원전 73년 ~ 기원전 71년)은 로마 속주 통치의 폐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베레스를 탄핵하는 연설을 했다.
로마 공화정 시기 시칠리아의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사건 | 기간 | 내용 |
---|---|---|
제1차 포에니 전쟁 | 기원전 264년 ~ 기원전 241년 | 로마, 카르타고를 꺾고 시칠리아를 첫 속주로 편입 |
제2차 포에니 전쟁 | 기원전 218년 ~ 기원전 201년 | 시라쿠사, 카르타고 편에 섰으나 로마에 함락 |
시라쿠사 함락 | 기원전 212년 | 아르키메데스 사망, 시라쿠사, 로마 속주에 편입 |
제1차 노예 전쟁 | 기원전 135년 ~ 기원전 132년 | 에우누스 주도 반란 |
제2차 노예 전쟁 | 기원전 104년 ~ 기원전 100년 | 살비우스 트리폰과 킬리키아의 아테니온 주도 반란 |
가이우스 베레스의 수탈 | 기원전 73년 ~ 기원전 71년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탄핵 연설 |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44년부터 기원전 36년까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후 시칠리아를 재편했다.[18][19] 기원전 36년 나울로코스 해전에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 파를,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가 이끄는 로마 공화정 군이 격파하면서 시칠리아는 옥타비아누스의 손에 들어왔다.
로마 제정 초기, 시칠리아는 상대적인 평화를 누렸지만, 점차 경제가 침체되고 도시가 쇠퇴했다. 하지만 4세기 이후, 시칠리아는 북아프리카와의 교역이 확대되면서 다시 번영을 누렸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시칠리아는 반달족과 동고트족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가 되면서, 시칠리아는 동서 문화 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2. 1. 고대 시칠리아
기원전 8세기부터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이 시칠리아에 식민 도시를 건설하면서, 시칠리아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특히, 그리스 식민 도시 시라쿠사는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시칠리아의 패권을 장악했다.[4]맘메르티니라고 불리는 캄파니아 용병 집단은 메시나를 장악했고, 시라쿠사의 장군 히에론 2세는 이들을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맘메르티니는 카르타고에 이어 로마의 지원을 요청했다.[4] 로마는 맘메르티니 지원을 결정했고, 이는 제1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241년)의 발발로 이어졌다.
로마는 메시나에서 시라쿠사와 카르타고군을 몰아냈다. 기원전 263년, 히에론 2세는 로마와 평화 조약을 맺고 동맹이 되어 로마에 곡물과 공성 무기를 제공했다.[5]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자 로마는 시라쿠사를 제외한 섬 대부분을 정복했다. 시라쿠사는 히에론 2세의 통치 아래 광범위한 자치권을 유지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에 큰 피해를 입혔다. 로마와 카르타고 양측 모두 잔혹 행위를 저질렀고, 많은 주민들이 노예로 팔리거나 도시가 파괴되었다.
로마의 승리로 시칠리아 섬 전체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시칠리아는 로마의 첫 속주가 되었으며, 프라에토르(지방 장관)와 두 명의 퀘스토르(재무관)가 파견되어 통치했다. 기원전 227년에는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시칠리아의 프라에토르로 파견되었고, ''렉스 프루멘타리아''에 의해 곡물 공물이 부과되었다.
이후 시칠리아는 번영했지만, 제1차 노예 전쟁 (기원전 138~132년)과 제2차 노예 전쟁 (기원전 104~101년)이라는 두 차례의 노예 반란이 일어났다.[16][17]
2. 2. 로마 시대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년~201년)은 한니발이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국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시작한 전쟁이다. 한니발은 갈리아를 거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공격했고, 칸나에 전투(기원전 216년)에서 로마군이 대패한 후, 시라쿠사의 왕 히에로 2세가 사망한다(기원전 215년). 그의 어린 손자 히에로니무스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다.[9] 이는 시라쿠사 내 친로마파와 친카르타고파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고, 한니발은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 형제를 시라쿠사로 보내 반(反)로마 감정을 부추겼다.칸나에 전투에서 살아남은 로마 병사들은 시칠리아에 격리되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섬을 떠날 수 없었다.[9] 히에로니무스의 결정으로 로마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를 시라쿠사로 파견했고, 카르타고 역시 군대를 보내 시칠리아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었다. 기원전 212년, 시라쿠사 공방전에서 마르켈루스 군대가 승리하면서 전쟁의 흐름이 바뀌었다. 시라쿠사 귀족이나 카르타고 측 스페인 용병 모에리쿠스의 배신으로 시라쿠사가 함락되었는데,[10] 이는 시라쿠사의 지형, 아르키메데스가 만든 방어 기계, 에우리알루스 요새 등으로 인해 로마군에게 큰 피해를 안겼다. 결국 시라쿠사는 약탈당했고, 아르키메데스를 포함한 많은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10]
마르켈루스는 신전과 공공 건물에서 약탈한 수많은 전리품을 로마로 가져갔는데, 이는 로마인들에게 그리스 미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11] 이후 로마는 시라쿠사 주민들이 싫어하는 마르켈루스 대신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에비누스(Marcus Valerius Laevinus)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시라쿠사는 시칠리아 속주의 수도이자 총독의 소재지가 되었다.
시칠리아 전역이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아그리겐툼은 기원전 210년까지 저항하다 누미디아 용병들의 배신으로 함락되었다.[12] 그해 여름, 로마에서는 집정관 선출을 위한 백인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마르켈루스가 선거를 주관할 예정이었으나, 그는 한니발을 그대로 두는 것이 위험하다는 서신을 원로원에 보냈다. 원로원은 마르켈루스를 소환할지, 아니면 기원전 209년 집정관 선거를 취소할지 논의한 끝에, 시칠리아에 있던 발레리우스 라에비누스를 소환하기로 결정했다.[12] 도시 프라에토르 루키우스 만리우스 아시디누스(Lucius Manlius Acidinus)는 발레리우스에게 서신을 전달하고 소환 이유를 설명하는 임무를 맡았다.[13]
발레리우스 라에비누스는 시칠리아에 도착하여 프라에토르 루키우스 친키우스 알리멘투스(Lucius Cincius Alimentus)에게 속주 통치와 군대 지휘를 위임하고, 함대 사령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시알라를 아프리카로 보내 카르타고의 동태를 살피고 영토를 약탈하게 했다.[14] 라에비누스는 로마로 돌아와 원로원에 카르타고 잔존 세력이 없고, 망명자들이 모두 돌아왔으며, 농업이 재개되었다고 보고했다.[15] 그는 209년 대부분을 시칠리아 농업을 복구하는 데 힘썼고, 시칠리아의 독립은 완전히 끝났으며, 섬의 상업 활동은 대부분 이탈리아로 향했다. 기원전 210년, 원로원은 시라쿠스에 자치권을 돌려주었고, 시라쿠스는 넓은 배후지를 갖게 되었다.
이후 시칠리아는 로마의 번영하고 평화로운 속주 중 하나였으나, 두 차례의 큰 노예 반란으로 혼란을 겪었다. 제1차 노예 전쟁(기원전 138년~132년)은 안티오쿠스 에우누스가 주도하여 엔나를 수도로 삼고 타우로메니움을 점령했다. 에우누스는 여러 차례 로마군을 격파했지만, 기원전 133년 푸블리우스 루필리우스에게 패배했다. 기원전 132년 타우로메니움과 엔나가 함락되면서 전쟁이 끝났고, 약 2만 명의 노예들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16] 제2차 노예 전쟁(기원전 104년~101년)은 서부에서는 킬리키아의 아테니온, 동부에서는 살비우스 트리폰이 이끌었다. 이 전쟁은 마니우스 아킬리우스에 의해 진압되었다.[17] 디오도로스 시쿨루스에 따르면, 시칠리아에는 지중해 동부에서 온 많은 노예들(약 20만 명)이 있었고, 이들은 섬의 경제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레비누스는 기원전 210년 ''렉스 프로빈치아이''를 도입하여 속주 도시들을 규제했다. 기원전 132년 푸블리우스 루필리우스는 제1차 노예 전쟁 이후 시칠리아에 적용되는 ''렉스 루필리아''를 완성했다. 시칠리아 도시들은 어느 정도 자치권을 누리고 소규모 화폐를 발행했지만, 로마 시민권을 가질 권리는 없었고, 4개의 법적, 행정적 계급으로 나뉘었다.[18][19]
1. '''''포데라테 키비타테스''''' (동맹 도시): 메시나, 타오르미나, 노토 등은 더 큰 자유를 누렸다.
2. '''''키비타테스 시네 포데레 임무네스 악 리베레''''' (동맹 없는 면제 및 자유 도시): 할라에사, 살레미, 첸투리페, 세제스타, 팔레르모 등은 ''데큐마''(수확의 1/10) 납부가 면제되고 내부 문제를 자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3. '''''키비타테스 데쿠마나에''''' (''데큐마'' 납세 도시): 대부분의 시칠리아 도시가 해당되며, ''렉스 히에로니카''에 따라 ''데큐마''를 납부해야 했다.
4. '''''키비타테스 켄소리에''''' (감찰관 지배 도시): 시라쿠사, 드레파눔 등은 전쟁에서 정복되어 권리와 특권을 잃고 국유지로 몰수되었다.
술라의 내전이 끝난 기원전 82년, 폼페이우스는 술라의 명으로 시칠리아에서 마리우스 지지 세력을 몰아내고 로마의 곡물 공급을 확보했다. 폼페이우스는 반대파를 진압하고, 불만을 제기하는 도시들에게 "내가 칼을 차고 있는데 왜 나에게 법을 칭찬하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시칠리아에서 정적들을 제거하고 파피리우스 카르보를 처형했다.[20]
당시 섬의 행정은 법무관이 담당했고, 시라쿠사와 릴리바에움에 배치된 두 명의 퀘스토르(재정관)가 그를 보좌했다. 일부 공동체는 여전히 민회를 운영했지만, 점차 지역 유력자들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
2. 2. 1. 로마 공화정 시기
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 ~ 기원전 241년) 결과, 로마 공화정은 카르타고를 꺾고 시칠리아를 첫 속주로 편입했다.[4] 전쟁 전 시라쿠사의 참주였던 아가토클레스 휘하의 맘메르티니 용병들은 메시나를 장악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4] 시라쿠사의 장군 히에론 2세는 이들을 제압하려 했으나, 카르타고의 지원을 받은 맘메르티니는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다. 로마는 맘메르티니 지원을 결정했고, 이는 제1차 포에니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시라쿠사를 제외한 시칠리아 대부분을 차지했다.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년 ~ 기원전 201년) 중, 시라쿠사는 카르타고 편에 섰다.[9] 히에론 2세 사후, 그의 손자 히에로니무스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다.[9] 이에 로마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를 파견하여 시라쿠사를 공격했다. 기원전 212년, 시라쿠사는 함락되었고, 아르키메데스를 포함한 많은 주민들이 사망했다.[10] 시라쿠사는 로마 속주에 편입되어 수도이자 총독의 소재지가 되었다.[10]
로마의 시칠리아 통치는 곡물 수탈과 라티푼디움(대농장) 확대로 이어졌다. 억압받던 노예들은 두 차례의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제1차 노예 전쟁(기원전 135년 ~ 기원전 132년)은 에우누스가 이끌었으며,[16] 제2차 노예 전쟁(기원전 104년 ~ 기원전 100년)은 살비우스 트리폰과 킬리키아의 아테니온이 주도했다.[17]
가이우스 베레스의 가혹한 수탈(기원전 73년 ~ 기원전 71년)은 로마 속주 통치의 폐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베레스를 탄핵하는 연설을 했다.
로마 공화정 시기 시칠리아의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사건 | 기간 | 내용 |
---|---|---|
제1차 포에니 전쟁 | 기원전 264년 ~ 기원전 241년 | 로마, 카르타고를 꺾고 시칠리아를 첫 속주로 편입 |
제2차 포에니 전쟁 | 기원전 218년 ~ 기원전 201년 | 시라쿠사, 카르타고 편에 섰으나 로마에 함락 |
시라쿠사 함락 | 기원전 212년 | 아르키메데스 사망, 시라쿠사, 로마 속주에 편입 |
제1차 노예 전쟁 | 기원전 135년 ~ 기원전 132년 | 에우누스 주도 반란 |
제2차 노예 전쟁 | 기원전 104년 ~ 기원전 100년 | 살비우스 트리폰과 킬리키아의 아테니온 주도 반란 |
가이우스 베레스의 수탈 | 기원전 73년 ~ 기원전 71년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탄핵 연설 |
2. 2. 2. 로마 제정 시기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44년부터 기원전 36년까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후 시칠리아를 재편했다.[18][19] 기원전 36년 나울로코스 해전에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 파를,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가 이끄는 로마 공화정 군이 격파하면서 시칠리아는 옥타비아누스의 손에 들어왔다.로마 제정 초기, 시칠리아는 상대적인 평화를 누렸지만, 점차 경제가 침체되고 도시가 쇠퇴했다. 하지만 4세기 이후, 시칠리아는 북아프리카와의 교역이 확대되면서 다시 번영을 누렸다.
2. 3. 중세 초기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시칠리아는 반달족과 동고트족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가 되면서, 시칠리아는 동서 문화 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3. 사회와 문화
기원전 73년부터 기원전 71년까지 시칠리아 속주의 집정관은 가이우스 베레스였다. 그는 시칠리아인들에게 갈취, 절도, 강도 혐의로 고발되었고, 키케로에 의해 로마에서 기소되었다. 키케로의 베레스에 대한 연설은 '베르레스 연설'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이 연설이 베레스의 행위에 대한 주요 증거이기 때문에, 그의 활동이 시칠리아에 미친 영향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기는 어렵다. 키케로는 베레스가 곡물세를 매우 가혹하게 징수하여 (공화국보다는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신성한 기증품을 포함한 예술품을 훔친 점을 강조했다. 베레스는 친구들의 권력과 법적 절차를 능숙하게 조작하여 무죄를 확신했지만, 키케로의 신랄하고 효과적인 첫 번째 연설 이후 망명했다.[37]
3. 1. 언어
로마 공화정 시대에도 시칠리아의 주요 언어는 여전히 그리스어였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시칠리아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7] 심지어 키케로 시대에도 그리스어는 엘리트 계층이 사용하는 주요 언어였으며, 키케로가 ''베르레스 연설''에서 언급한 거의 모든 시칠리아인들은 그리스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39] 키케로는 또한 그리스 달력, 그리스 축제, 시칠리아 도시와 범헬레니즘 성역(델포이 등) 간의 관계,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한 시칠리아인, 그리고 그리스 시민 건축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와 칼라케의 카에킬리우스와 같은 작가들은 계속 그리스어로 문학 작품을 썼다.시칠리아의 시칸어, 시켈어, 엘림어, 푸니크어와 같은 그리스어가 아닌 언어들은 시골 지역에서 계속 사용되거나 전통적인 종교 의식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엘리트 계층의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40] 일부 마메르티니는 이탈리아 방언을 유지했을 수도 있다.
로마 제정 시대 초기에는 6개의 로마 ''콜로니아''가 설립되면서 시칠리아에 다수의 라틴어 사용자가 처음으로 등장했고, 이는 비잔틴 시대까지 지속된 라틴어-그리스어 이중 언어 사용으로 이어졌다. 제정 시대에 라틴어는 점점 더 많은 영역에서 그리스어를 대체해 나갔지만, 그리스어는 역사적 권위를 유지하며 널리 사용되었다. 티투스 칼푸르니우스 시쿨루스, 율리우스 피르미쿠스 마테르누스 등이 라틴어로 문학 작품을 제작하면서 라틴어는 엘리트 계층의 언어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러나 판타이누스, 메세네의 아리스토클레스, 릴리바이움의 프로부스, 키타리우스와 같이 제정 시대에도 그리스어로 글을 쓴 시칠리아 작가들도 있었다.[41] 이 시대에 그리스어가 아닌 언어들은 거의 사라졌지만, 아풀레이우스의 증언에 따르면 푸니크어는 제정 시대 말기까지 계속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42]
3. 2. 종교
로마 시대 이전 시칠리아에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숭배하는 그리스인들의 종교가 널리 퍼져 있었고, 페니키아인들의 신앙도 존재했다. 로마의 지배 이후에는 로마 신화가 유입되었지만, 그리스인들의 종교는 여전히 큰 영향력을 유지했다.[39]기독교는 1세기경 시칠리아에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았지만, 3세기 이후 시칠리아에서도 점차 확산되었다. 특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공동체에서 기독교 신앙이 널리 퍼졌으며, 이들은 주로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사용했다.[43]
4. 주요 도시
로마 시대 도시명 | 라틴어 표기 | 현대 도시명 | |
---|---|---|---|
속주도 | 시라쿠사 | Syracusæla | 시라쿠사 |
카타나 | Catanala | 카타니아 | |
타우로메니움 | Tauromeniumla | 타오르미나 | |
메사나 | Messanala | 메시나 | |
뮈라에 | Mylaela | 밀라초 | |
테르마에 | Thermaela | 테르미니 임메레세 | |
파노르무스 | Panormusla | 팔레르모 | |
셀리누스 | Selinūsla | 셀리눈테 | |
헤라클레아 미노아 | Heraclea Minoala | ||
아그리겐툼 | Agrigentumla | 아그리젠토 | |
게라 | Gelala | 젤라 | |
카마리나 | Camarinala | ||
무디나(멜리타 섬) | Mdinala (Melita Insula) | 임디나 (몰타섬) | |
마르사(멜리타 섬) | Marsala (Melita Insula) | 마르사 (몰타섬) |
4. 1. 시라쿠사
기원전 212년 이후 시라쿠사는 새로운 로마 속주의 수도가 되었다. 가이우스 베레스의 부정부패와 예술 유산의 체계적인 약탈[18][19]에도 불구하고, 시라쿠사는 속주의 수도이자 재판관의 소재지로 남았다. 동서 간의 상업적 교류를 위한 주요 항구로서의 역할도 계속되었다. 성 바울로와 (시라쿠사의 초대 주교) 마르시아노는 이 도시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칙령 이전 로마의 기독교 박해로 인해, 로마 다음으로 규모가 큰 깊은 카타콤 네트워크가 도시 아래에 건설되었다. 440년 반달족의 공격을 시작으로 잇따른 공격으로 도시가 빈곤해지다가 535년 비잔틴 장군 벨리사리우스에게 정복당했다. 663년부터 668년까지 도시는 콘스탄스 2세 황제의 거주지이자 시칠리아 모든 교회의 수도였다.

4. 2. 카타니아
카타나 또는 '''카티나''' (카타니아)는 기원전 263년, 제1차 포에니 전쟁 초기에 집정관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메시알라에 의해 정복되었다.[44] 정복 전리품 중 일부는 해시계였으며, 이는 로마의 코미티움에 설치되었다.[45] 이 도시는 로마에 조공을 바쳐야 하는 ''civitas decumana''였다. 시라쿠사의 정복자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이 도시에 체육관을 건설했다.[46] 기원전 135년경, 제1차 노예 전쟁 중에 이 도시는 반란 노예들에게 정복되었다.[47] 기원전 35년 검투사 세레우스가 이끄는 이 지역의 또 다른 반란은 지도자가 사망한 후 진압되었다.[47] 기원전 122년, 에트나 화산 활동으로 도시 지붕에 화산재가 쏟아져 붕괴되는 심각한 피해가 발생했다.[48] 카티나의 영토는 기원전 50년, 44년, 36년에 발생한 분화와 기원전 32년의 재앙적인 용암류로 인해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용암류는 시골과 아이트나 도시를 파괴했고, 아우구스투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간의 전쟁으로 이어졌지만,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길고 어려운 사회 경제적 회복이 시작되었다.전쟁이 끝날 무렵, 시칠리아는 광범위하게 손상되고, 가난해지고, 인구가 감소한 것으로 묘사된다. 스트라보의 저서 6권에는 시라쿠사, 카타니아, 첸투리페의 황폐한 상태가 언급되어 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전쟁 후, 아우구스투스는 카타니아에 ''콜로니아''를 설립했다. 플리니우스는 로마인들이 카티나라고 불렀던 이 도시를,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1년에 시라쿠사, 테르메 (샤카)와 함께 콜로니아 로마나로 승격시킨 도시 중 하나로 나열했다. 로마군 퇴역 군인들이 이 도시에 정착했다. 새로운 인구 통계는 "중산층"을 선호하는 도시 생활 방식 변화에 기여했다.
카타니아는 후기 공화국과 제국 시대에 상당한 중요성과 부를 유지했다. 키케로는 이 도시를 "가장 부유한" 도시라고 불렀고,[49] 이는 후기 제국 시대와 비잔틴 시대에도 유지되었을 것이다. 문헌 자료와 현대 기념물이 이를 뒷받침하며, 이는 로마 시칠리아의 도시들 중에서 이 도시를 거의 독특하게 만든다. ''stipendium''을 지불하기 위해, 카타니아와 같은 대규모 해안 도시는 제국 시대에 섬 내부의 광대한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확대했다. 이 지역은 농업을 지배했던 대규모 영지로 인해 인구가 감소했다.
기독교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데키우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기간 동안 순교한 성 아가타와 성 유플리우스는 도시의 수호 성인이다. 카타니아 대교구는 6세기 말에 설립되었다.
4. 3. 기타 도시
타오르미나(Tauromenium)는 기원전 212년 시칠리아가 로마 속주가 될 때까지 시라쿠사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의 '동맹 도시'로 여겨졌으며, 키케로는 《베르레스 탄핵 연설》에서 이곳을 세 곳의 '동맹 도시'(civitates foederatae) 중 하나로 언급하며 '주목할 만한 도시'(civis notabilis)라고 칭했다. 제1차 노예 전쟁 (기원전 135~132년경) 동안 반란 노예들에게 점령되어 요새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36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전쟁 중, 옥타비아누스 군대가 낙소스에 상륙하여 도시를 재점령했다. 기원전 21년, 아우구스투스는 이 도시에 로마 '식민지'(colonia)를 건설했다.메시나(Messana)는 기원전 264년에 로마에 항복했으며,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타오르미나와 함께 ''자유 동맹 공동체''라는 지위를 받았다. 키케로는 베르레스 연설에서 이 도시를 ''매우 크고 부유한 공동체''로 언급했다. 기원전 49년, 폼페이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함대를 공격하여 메사나 항구로 몰아냈다. 그 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기지가 되었고, 레피두스의 군대에 의해 약탈당했다. 아마도 자치시가 되었을 것이다.
틴다리(Tyndaris)는 제1차 포에니 전쟁 초기에 카르타고의 해군 기지가 되었다. 틴다리스 해전은 기원전 257년에 인근에서 벌어졌으며, 로마 함대가 카르타고를 격파했다. 이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해군 기지가 되었으며, 기원전 36년에 옥타비아누스에게 점령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자리에 로마 식민지인 콜로니아 아우구스타 틴다리타노룸(Colonia Augusta Tyndaritanorum)을 설립했다. 키케로는 이 도시를 "가장 고귀한 도시(nobilissima civitas)"라고 불렀다.
테르미니이메레세(Thermae Himerae)는 기원전 260년 제1차 포에니 전쟁 중 로마가 패배를 겪은 곳이었지만, 기원전 253년에 로마에게 정복되었다. 이후 로마에 충성을 다했으며 공물을 바치는 도시 중 하나였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물리친 후 옥타비아누스는 이곳에 ''콜로니아''를 설립했다.
팔레르모(Panormus)는 제1차 포에니 전쟁까지 카르타고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기원전 254년 로마 함대가 도시를 공격하여 속주로 만들기 전까지 카르타고와 로마 간의 주요 분쟁지였다. 기원전 247년 하밀카르 바르카가 재정복을 시도했지만 로마에 충성했고, 그 대가로 섬의 다섯 자유 도시 중 하나로 남았다.
트라파니(Drepanum)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 정복되었으며, 항구, 지중해 해상 교통로 상의 지리적 위치, 활발한 해염 산업, 산호 채취 덕분에 번성하는 상업 도시가 되었다.
마르살라(Lilybaeum)는 카르타고인 통치 하에서 번성했으며, 로마가 매년 시칠리아에 파견하는 퀘스토르 중 하나의 소재지였다. 훌륭한 저택과 공공 건물로 풍요로워졌다. 페르티낙스 황제 통치 하에 헬비아 아우구스타 릴리바이타노룸(Helvia Augusta Lilybaitanorum)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로마 식민지가 되었다.[50]
로마 시대 도시명 | 동(同) 로마 시대 라틴어 표기 | 현대 도시명 | |
---|---|---|---|
속주도 | 시라쿠사 | Syracusæla | 시라쿠사 |
카타나 | Catanala | 카타니아 | |
타우로메니움 | Tauromeniumla | 타오르미나 | |
메사나 | Messanala | 메시나 | |
뮈라에 | Mylaela | 밀라초 | |
테르마에 | Thermaela | 테르미니 임메레세 | |
파노르무스 | Panormusla | 팔레르모 | |
셀리누스 | Selinūsla | 셀리눈테 | |
헤라클레아 미노아 | Heraclea Minoala | ||
아그리겐툼 | Agrigentumla | 아그리젠토 | |
게라 | Gelala | 젤라 | |
카마리나 | Camarinala | ||
무디나(멜리타 섬) | Mdinala (Melita Insula) | 임디나 (몰타섬) | |
마르사(멜리타 섬) | Marsala (Melita Insula) | 마르사 (몰타섬) |
5. 한국의 관점
한국의 역사에서도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경험한 사례가 많다. 시칠리아의 역사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생존과 번영을 추구했던 한 지역의 역사를 보여준다. 특히, 일제 강점기 한국은 시칠리아처럼 외세의 수탈과 억압을 겪었으며, 이에 저항하는 민족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볼 때, 시칠리아의 역사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폐해를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특히, 로마의 곡물 수탈과 노예제 기반의 라티푼디움 확대는 사회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민중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대표적인 사례이다.
6. 결론
베레스 이후 시칠리아는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전직 법무관의 약탈에 대한 보상은 받지 못했다. 카이사르의 내전(기원전 49–45년)도 평상시의 업무를 중단시키지 않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내전을 시작한 후 섬을 장악했고, 아시니우스 폴리오가 카이사르의 사절로 파견되어 당시 섬의 총독이었던 카토를 제거했다.[27]
카이사르 암살(기원전 44년) 이후, 기원전 42년,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제2차 삼두정치와 충돌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밀라에, 틴다리스를 장악한 다음 메사나를 장악하여 시칠리아 전체가 그에게 복종했다.[28]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시칠리아에서 로마로의 곡물 공급을 막았다. 기원전 39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제2차 삼두정치는 미세눔 조약을 체결하여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통제하고, 그의 감금된 노예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것을 인정했다. 그 대가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로마 봉쇄를 끝내고, 시칠리아의 로마 곡물 공급을 재개하며 더 이상 노예를 모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28] 그러나 이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고, 옥타비아누스는 메시나 해전 (기원전 37년)에서 해상에서 패배했고, 기원전 36년 8월에도 패배했다.[29]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의 부관인 아그리파는 기원전 36년 9월 나울로쿠스 해전에서 섹스투스의 함대를 파괴했다.[30] 옥타비아누스는 시칠리아에 의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했고, 그에게 저항했던 도시들은 가혹하게 처벌받았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공화국에 대한 단독 권력을 갖게 되었고, 기원전 27년에 원로원은 이 상황을 공식화했고 그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얻었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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